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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고대 문명사/서양 고대사

아테네 vs 스파르타 – 두 도시국가의 극과 극 비교

by with-12 2025. 6. 21.

아테네 vs 스파르타 – 두 도시국가의 극과 극 비교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과 민주주의 문구

 

 

아테네는 자유를, 스파르타는 질서를 택했다. 두 도시는 그리스 문명의 두 얼굴이었다.
– 역사학자 J.B. 베리

지금은 K-민주주의라는 말이 생겨난 것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관련하여 직접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그리스를 떠올 릴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봅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폴리스'라는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두 곳이 아테네와 스파르타입니다. 이 두 국가는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가치관과 체제, 시민의 삶에 있어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정치 제도의 심층 비교

아테네는 고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직접 민주주의(direct democracy)를 운영했습니다. 시민(성인 남성 자유민)은 민회(에클레시아)에 직접 참석하여 입법, 재정, 외교, 군사 등의 사안을 투표로 결정했습니다. 민회는 보통 한 달에 4번 열렸으며, 연간 약 40회의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정책 집행은 500명으로 구성된 ‘평의회(불레)’가 맡았고, 대부분 추첨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또한 ‘법정(디카스테리아)’은 수백 명의 시민 배심원이 공개 재판을 통해 판결을 내리는 구조였습니다. 이는 권력의 분산과 시민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스파르타는 복합 군사 귀족정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최고 권력자는 2명의 왕이었으나, 실질적인 정무와 외교는 28인의 원로회(게루시아)가 주도했습니다. 이들은 만 60세 이상의 귀족 남성으로 구성되며 종신직이었습니다.

또한 매년 선출되는 5인의 감시관(에포로스)은 왕보다 높은 권한으로 왕을 통제할 수 있었고, 군사 전략·교육·경제 정책에 직접 개입했습니다. 이는 집단 엘리트가 군사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둔 체제였으며, 시민의 정치 참여는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교육 시스템의 철저한 대비

아테네의 교육은 시민의 덕성과 이성을 중시하는 교양 중심 교육이었습니다. 소년들은 7세 무렵부터 학교에 다니며 읽기, 쓰기, 산술, 음악, 체육을 배웠고, 청소년기에는 수사학과 철학을 익혀 공공 토론과 정치 참여 능력을 기르도록 훈련받았습니다.

특히 아테네 교육의 핵심은 아시다시피 논쟁과 토론이었습니다. 시민은 공직에 오르거나 법정에서 직접 자기 입장을 변호해야 했기 때문에 설득력 있는 말하기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테스형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시작한 ‘문답법’은 이런 교육 문화의 상징이었습니다.

반면 스파르타는 철저히 국가 주도의 군사 교육 시스템 ‘아고게’를 운영했습니다. 7세가 되면 남자아이들은 부모 곁을 떠나 군사 훈련소에서 집단 생활을 시작했고, 굶주림을 이겨내고 몰래 절도해오는 훈련, 고통을 참고 견디는 훈련 등 극단적인 실전 교육을 받았습니다.

스파르타 교육의 목표는 **복종, 절제, 강인함**이었고, 완전무결한 병사가 되는 것이 시민으로 인정받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독립적인 사고보다는 공동체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헌신이 강조되었으며, 교육의 결과로 스파르타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훈련된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TIP: 아테네는 '생각하는 인간'을, 스파르타는 '싸우는 인간'을 양성했다는 말로 두 교육의 차이를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성과 시민의 지위

아테네 여성은 법적으로 보호받는 존재가 아닌, 남성의 관리 대상이었습니다. 그녀들은 결혼을 통해 남편 가문의 일원이 되었고, 재산을 소유하거나 유산을 독립적으로 상속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교육도 제한적이었고, 외부 활동은 최소화되었습니다.

반면 스파르타 여성은 국가의 존속을 위한 '건강한 후손 생산자'라는 역할을 맡았기에 신체 훈련을 적극적으로 받았고, 토지 상속권도 보장되었습니다. 실제로 기원전 4세기 무렵에는 스파르타 토지의 40% 이상이 여성 소유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경제와 사회 구조

아테네의 경제는 해상 무역과 장인 생산을 기반으로 성장했습니다. 피레우스 항구를 중심으로 지중해와 흑해를 오가며 곡물, 도자기, 은 등을 거래했으며, 메토이코이(외국인 거주민)들이 주로 경제 실무를 맡았습니다. 노예도 일상적으로 활용되었으며, 광산과 가정, 공공건설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일했습니다.

스파르타는 토지 정복 후 피지배민(헬롯)을 노동력으로 삼아 자급자족형 농업 사회를 유지했습니다. 헬롯은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고 수확의 상당 부분을 스파르타 시민에게 상납해야 했습니다. 시민은 경제활동에 거의 종사하지 않고 전쟁에만 집중하는 특수 계층이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개와 결과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은 그리스 내 최대 규모의 내전으로, 해양세력 아테네와 육상강국 스파르타의 체제 대결이었습니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통해 많은 도시국가에서 공물을 거두며 제국화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스파르타가 중심이 된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충돌한 것입니다.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아테네의 대흑사병, 알키비아데스의 망명 등의 혼란 속에서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해군력을 확보하며 최종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전후의 혼란은 두 도시국가뿐 아니라 그리스 전체의 쇠퇴로 이어졌습니다.



철학과 가치관의 뿌리

아테네는 철학으로 유명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윤리와 정의를, 플라톤은 이데아와 이상국가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와 경험적 세계를 탐구했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유럽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오늘날까지 정치, 교육, 과학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스파르타는 철학적 기록은 남기지 않았지만, 실천적 가치관을 통해 사회를 유지했습니다. 말보다는 행동, 사고보다는 복종이 우선시되는 문화 속에서 질서 있는 국가 운영과 공동체 중심의 삶이 이어졌습니다.



현대 세계에 남긴 유산

아테네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됩니다. 시민 참여, 토론, 법 앞의 평등이라는 이상은 현대 입헌민주주의 국가들의 정치제도 설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미국, 프랑스 등의 정치 모델에 직접적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스파르타는 공동체 정신과 철저한 훈련, 국가 우선주의라는 유산을 남겼습니다. 군사학교, 징병제, 청소년 체육 교육 등에 스파르타식 철학이 녹아 있으며, 현대에도 '스파르타식 훈련'이라는 말은 강인함의 상징처럼 쓰입니다.



FAQ

Q.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오늘날과 같았나요?
아니요.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만 참여 가능한 직접 민주제였으며, 여성과 노예, 외국인은 제외되었습니다.

Q. 스파르타는 왜 그렇게 군사 중심이었나요?
헬롯(정복민)들의 반란을 억제하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상시 군사 체제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결론: 두 개의 길, 하나의 문명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정반대의 선택을 통해 고대 그리스 문명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두 도시의 경험을 통해 민주주의와 규율, 자유와 질서 사이에서 균형을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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