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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고대 문명사/서양 고대사

카이사르를 찌른 23번의 칼날 - 브루투스가 그날 저지른 5가지 결정적 선택

by with-12 2025. 6. 27.

카이사르를 찌른 23번의 칼날 – 브루투스가 그날 저지른 5가지 결정적 선택

카이사르 암살 장면을 그린 회화 작품 – 원로원 의원들이 쿠리아에서 카이사르를 공격하는 순간을 묘사

권력은 종종 사람을 바꿉니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권력 그 자체가 시스템을 찢어놓았습니다. 카이사르의 암살은 단순한 배신이 아닌, 공화정과 제정의 경계선에서 벌어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치적 사건이었죠. 오늘은 그날의 전말을 다섯 가지 결정적 순간으로 정리해보려 합니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 뒤에 숨은 정치와 충돌, 지금부터 파헤쳐봅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타인의 배신에 의연해야 한다
The greatest man must be prepared for the betrayal of others
Julius Caesar




1. 브루투스는 왜 칼을 들었는가 – 공화정 수호자의 명분과 사적인 갈등

 

브루투스는 단순한 반역자가 아니었습니다.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는 정의롭고 청렴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었고, 카이사르 역시 그를 각별히 신뢰했습니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정치적 계승자로 거론될 만큼 가까운 사이였기에, 그의 배신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죠. 그런데 왜 그는 스승이자 친구인 카이사르를 찌르기로 결심했을까요?

 

표면적으로 그는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라고 말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으로 임명되자, 로마가 다시 왕정으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퍼졌고, 브루투스는 귀족파 중심의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자유를 위한 결단’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 선택은 단지 이념이나 체제를 위한 결정만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질투와 계층 간 권력 다툼을 지적합니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중앙집권적 권력이 자신을 포함한 전통 귀족층의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느꼈고, 개인적 갈등 또한 암살 동기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그의 선택은 공화정 수호의 이상주의와 기득권 수호라는 현실 사이에서 만들어진 복합적인 결과였던 셈입니다.




2. 루비콘을 건넌 후 – 카이사르와 원로원의 불가피한 충돌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 순간, 로마 내전의 도화선을 당겼습니다. 이는 단순한 국경 넘기가 아니라 로마 법질서를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로,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채 이탈리아 본토에 진입하는 것은 곧 반역을 의미했죠. 그럼에도 그는 과감히 행군을 시작했고, 이는 로마 역사상 가장 극적인 갈등을 불러왔습니다.

 

당시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팽창하는 권력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갈리아 전역을 정복하며 병력을 확보했고, 로마 민중의 지지도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반면 원로원은 정치적으로 분열돼 있었고, 폼페이우스조차 확고한 리더십을 갖지 못했기에 카이사르의 귀환을 막을 뚜렷한 수단이 없었습니다. 결국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던 것이죠.

 

이러한 배경은 브루투스를 비롯한 귀족파들이 왜 그렇게 초조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군사력, 민심, 행정권력을 모두 손에 넣은 카이사르는 사실상 ‘황제’의 길을 밟고 있었고, 이는 기존 로마 공화체제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때부터 브루투스와 암살단은 진지하게 ‘물리적 제거’라는 극단적 선택을 고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3. 암살 전날의 로마 – 긴장과 불안이 뒤섞인 예고된 파국

 

암살이 일어나기 전날, 로마는 숨죽인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그가 쥔 권력은 너무도 절대적이었기에 주변의 경계심도 그만큼 짙었습니다. 원로원 안팎에서는 은밀한 회합이 이어졌고, ‘이대로 두어선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퍼져나갔습니다.

 

당시 카이사르는 스페인 원정을 준비 중이었고, 집정관 자리와 함께 신전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계획까지 추진 중이었습니다.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이를 ‘왕의 부활’이라 표현하며 공개적으로 반대했지만, 그 목소리는 카이사르의 기세에 눌려 묻히기 일쑤였습니다. 이에 따라 브루투스를 포함한 소수의 원로원 세력은 비밀리에 행동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 유명한 암살 장소, 포룸 북동쪽의 쿠리아(원로원 회의장)에선 각본처럼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언자와 부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회의장에 출석했고, 그날 아침 암살자들은 일상적인 인사처럼 둘러선 채, 결정적인 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역사의 방향은 정해지고 있었던 것이죠.




4. 3월 15일, 그날의 현장 – 루비콘보다 더 찢긴 비극

 

기원전 44년 3월 15일, ‘이드의 날(Ides of March)’로 기록된 이 날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닌,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불꽃이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쿠리아 포르니키아에 들어섰을 때, 공기는 평소보다 무겁고, 의원들의 얼굴엔 평상시와 다른 긴장이 역력했습니다. 그는 눈치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첫 번째 칼은 카스카에 의해 찔렸습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습격에 그는 “이게 무슨 짓이냐!”라고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곧이어 수십 명의 원로원들이 앞다퉈 달려들었고,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브루투스가 그 대열에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평소 카이사르가 ‘내 아들과도 같다’고 표현했던 인물이었기에, 이 배신은 그 어떤 공격보다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외침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처절한 배신의 상징처럼 남아 있습니다. 23번의 칼에 찔린 후, 카이사르는 조용히 바닥에 쓰러졌고, 쿠리아 바닥엔 그의 피가 로마의 운명을 새기듯 흥건히 퍼져나갔습니다. 이 날, 정치가 아닌 감정과 공포가 모든 것을 지배한 순간이었습니다.




5. 암살 이후 – 로마는 진짜 더 나아졌을까?

 

브루투스를 비롯한 공모자들은 카이사르를 제거하면 공화정의 영광이 되살아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들은 시민들이 열렬히 환호하며 자유의 회복을 기뻐할 거라 확신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로마는 충격에 빠졌고, 거리에는 슬픔과 혼란이 뒤섞인 분노가 가득 찼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장례식에서 카이사르의 피 묻은 옷을 흔들며 그의 업적을 열렬히 호소했고, 군중은 감정적으로 격앙되었습니다. 불길은 곧 카이사르를 찌른 이들을 향했습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자유의 수호자”가 아닌 “국가 반역자”로 낙인찍혔고, 민심은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결국 이 암살은 공화정의 복원이 아닌, 제2차 삼두정치의 탄생과 더 치열한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는 이 혼란을 기회로 삼아 권력을 장악했고, 로마는 황제의 시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역사는 역설적이게도, 공화정을 지키겠다는 이상이 절대 권력의 문을 열어준 셈이죠.




마무리하며 – 칼날의 의미는 권력보다 더 깊었습니다

 

카이사르 암살은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라, 로마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둘러싼 깊은 철학적 갈등이었습니다. 브루투스는 이상을 위해 칼을 들었고, 카이사르는 명분을 넘어 현실의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결코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죠.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 장면을 떠올리며 묻습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권력은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유효하며, 로마사 속 한 장면이 아닌 지금 우리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암살 이후 펼쳐지는 복수와 권력 재편의 서막, 필리피 전투와 옥타비아누스의 등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이제 진짜 로마 제국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다음 이야기
로마 제국의 탄생 – 옥타비아누스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Q: 브루투스는 왜 정말로 카이사르를 죽였나요?
A: 권력을 독점한 카이사르가 공화정의 원칙을 무너뜨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상주의적 결단이었다는 해석과, 정치적 현실에 휘말린 인물이었다는 해석이 공존합니다.
Q: 카이사르 암살 이후 로마는 어떻게 되었나요?
A: 암살 직후 로마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으며, 결국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권력 투쟁 끝에 제정 로마가 출범하게 됩니다.
Q: 브루투스는 이후 어떻게 되었나요?
A: 브루투스는 필리피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결합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믿었지만, 후세의 평가는 엇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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